제 6
장
후스와 제롬
보헤미아의
진리의 옹호자
복음이
보헤미아에 전파되기는
이미 9세기의
일이었다. 성경이
번역되고 백성들은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법왕권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가리워졌다.
평소에 왕들의
권세를 꺾어 버릴 뿐
아니라 백성들을 노예의
상태로 만들고자 꾀해
오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예외 없이 보헤미아어로
공중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교서를 내렸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이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악과
이단이 생기게 되었다”*고
법왕은 선언하였다.
그와 같이 로마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꺼버리고 백성들을
암흑 가운데 가두어
두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기구를 통하여 교회를
보존하시고자 계획하셨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박해를
만나 쫓겨난 많은
왈덴스와 알비젠스(Albigenses)인들이
보헤미아로 피난하였다.
비록 그들은 그
곳에서 공공연하게
전도하지 못하였으나
은밀한 가운데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참된
신앙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보존되어 왔다.
후스가
태어나기 전에 보헤미아에는
이미 교회의 부패와 백성들의
비행을 공공연하게 규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끌었다.
그러므로 승려
계급은 두려움을
느끼고 복음 사도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그들은 숲 속과
산으로 쫓겨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군사들은 그들을
찾아내어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얼마 후에
로마교의 예배에서
벗어나는 자는 화형에
처한다는 명령이
내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들의 사업의 승리를
확신하고 눈을 감았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진리의 원수의
분노는 오늘날
우리들을 이기고 있지마는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평민 가운데서 한
사람이 권세와 검을
쥐지 않고 일어날
것인데, 그들은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루터의
시대는 아직 먼 미래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제 로마를 공격하는
그의 증언으로 모든
나라를 일깨우게 할 한
사람이 일어나는 중에
있었다.
후스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총장이 되기까지
얀
후스(John Huss)는
비천한 계급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에 그의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그의
경건한 어머니는 교육시키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러한 유업을 그
자식에게 남겨 주고자
애를 썼다.
후스는 처음에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그 후에
프라하 대학의 자선
장학금으로
공부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프라하를
향한 여로에 올랐다.
과부로서 가난에
시달리는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줄 만한 세상 재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큰 도시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아버지 없는 자기의
아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위하여 하늘
아버지께 복을 빌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자기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
것인지에 대하여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후스는 부지런한
공부와 신속한 학업의
향상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깨끗한
생애와 온유하고
쾌활한 성격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로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교회가 수여한다고
공언하는 영적 축복을
매우 갈망하였다.
그는 어떤 큰
성회에 참석하였을 때
참회하러 나아가 호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돈을 다
털어 바치고 사면(赦免)을
얻기 위하여 행렬
가운데 참례한 일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 그는 신부의
직분을 얻었으며,
그 후 신속히
승진하여 왕실 전속의
승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모교의 교수가 되고,
그 후에 그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불과
수년만에 구호금의
장학금을 받던 비천한
일개 학생이 보헤미아의
자랑이 되고,
그 명성을 온
구라파에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 분야에서
개혁 사업을 착수하였다.
성직에 나간 지
수년 후에 그는
베들레헴 회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 회당의
설립자는 성경을
자국어로 설교하는
일을 참으로 중요한
일로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그 일은 로마에서
반대하는 일이었으나
보헤미아에 있어서는
완전히 중지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성경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무지는
실로 컸으며,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가장 악한
일들이 편만해 있었다.
후스는 이러한
죄악들을 기탄없이 견책하고,
자기가 설명한
진리의 원칙과 순결을
역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곡히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로
전향(轉向)함
후에
후스의 절친한 친우가
된 프라하 출신의 제롬(Jerome)이
영국으로부터 귀국하면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으로
개종한 영국 왕후는
원래 보헤미아의 공주였으므로,
그의 감화로 말미암아
보헤미아에는 개혁자의
저술이 널리 유포되었다.
후스는 그러한
저술들을 흥미있게
읽었다. 그는
그 저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었으며 위클리프가
주장하는 개혁주의에
찬동하게 되었다.
비록 후스 자신은
깨닫지 못하였으나 이
때에 그는 그를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인도할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 때에
프라하에
영국으로부터 학식
있는 두 사람이 왔다.
그들은 진리의
밝은 빛을 받았는데,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이렇게 먼
지방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법왕의
최상권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으므로 즉시
당국으로부터 발언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의 목적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한 가지의
계책을 세웠다.
그들은 본래
설교자인 동시에 화가였으므로
그들의 기술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렸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광경이었는데,
그분께서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마
21:5)타셨다.
제자들은 여행으로
더러워진 헌 옷을 입고
맨발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법왕의
행렬을 그린 것인데,
법왕은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삼층
면류관을 쓰고
아름답게 장식한 말을
타고 있으며,
그 앞에는 나팔수들이
가고 있었고,
뒤에는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의 주목을 끈 무언의
설교였다. 군중들이
몰려와서 그 두 장의
그림을 주목하여
보았다. 그
그림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주
되시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
그리고 그분의
종이라고 자칭하는 법왕의
자고와 교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프라하에는
큰 동요가 생겼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얼마 후에 그
곳을 떠나 갔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교훈은
잊혀지지 않았다.
특별히 그 그림은
후스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과 인상을 주었으므로
그는 성경과
위클리프의 저서를
더욱 세밀히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아직 위클리프의 개혁설을
모두 받아들일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마는 법왕교의
진상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으므로
타는 듯한 열성으로
교권의 부패와 교만과
야심을 규탄하였다.
개혁자
후스와 프라하의
대소동
진리의
빛은 보헤미아에서
독일로 전파되었다.
왜냐하면 프라하
대학의 소동으로
수백명의 독일
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의 많은
학생들이 후스에게서
처음으로 성경의
지식을 배웠는데,
그들은 돌아가서
각자 자기 나라의 여러
곳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프라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후스는 곧 법왕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에 응하는
것은 자기의 몸을
죽음에 내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보헤미아의
왕과 왕후와 대학과
귀족과 정부의
고관들이 연합하여
후스는 프라하에
머물러 있게 하고,
대리자를 로마에
파견시켜 대답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법왕에게
애소하였다.
그러나 법왕은 그
요구를 수락하는 대신에
도리어 후스에게 대하여는
심문 선고를 내리고
프라하 시를 파문(破門)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다.
그 당시에
있어서 이와 같은
선고는 언제나 큰
공포를 일으켰다.
거기에 따르는
의식들은 법왕을
하나님의 대표자로
존경하고, 그를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영적 심판은
물론이요, 세속적
심판까지 행할 권능을
가진 자로 알고 있는 백성들을
공포에 질리게 할 수
있도록 잘 꾸며졌다.
파문의 선고를
받은 지방에는 하늘의
문이 닫혀지므로 법왕이
그것을 열기까지는
죽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처럼
두려운 재난의
증거로서 온갖 종교적
의식은 정지되고,
교회는 폐쇄되고,
결혼식은 교회당의
뜰 앞에서 거행되고,
죽은 자는 성별된
묘지에 매장되지
못하고 장례식 없이
도랑이나 벌판에 매장되었다.
로마는 사람의
상상력에 자극을 주는
이런 종류의 처사를
통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프라하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재난을 만난
것은 오로지 후스
때문이라고 그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징벌에 신속히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소동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후스는 잠시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프라하에
남겨 놓고 온 친구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내가
그대들을 떠나온 것은
나쁜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영원한 죄의
선고를 자취하지
않도록 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고난과 박해가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교훈과
모본을 따라서 행한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경건치 않은
신부들이 그대들 가운데서
더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금지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한
나머지 잠시 동안
물러나온 것뿐이다.
나는 거룩한
진리를 거절하므로
그대들을 떠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진리를 위하여서는
죽음도 사양치 아니한다.”*
그러나 후스는
자기의 활동을 그치지
아니하고 각지로
다니며 진리를
갈급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법왕이 복음을 감추어
버리고자 취한 조치는
도리어 그것을 더 널리
전파하는 방편이
되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고후
13:8)다.
“그 당시의
후스의 마음에는
일종의 번민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교회는 위협으로 그를
억누르고자 했지만,
그는 아직까지 교회의
권위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로마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배우자요,
법왕은 하나님의
대표자요 대리자였다.
후스가 싸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권위의
악용이었지 원칙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 사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그의 양심의 주장
사이에 무서운 갈등을
일으켰다. 자기가
그렇다고 믿은 대로
로마교의 권위가
정당하고 그릇됨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거기에 불순종해야
한다고 느껴지는가?
그는 복종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소위 흠이 없는 교회에
복종하는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가?
이것이 바로 그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를 언제나
번민하게 하는
의문이었다.
그가 궁리해 낼
수 있었던 가장 가능한
해답은 일찍이 구주 당시에
그랬었던 것처럼 교회의
제사장들이 악한
사람들로 바뀌어져서
그들의 합법적인
권위를 불법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해답은
후스로 하여금,
깨달음을 통하여
전달된 성경의 교훈들이
양심을 지배해야
한다는 좌우명을
자신의 지도를 위한
지침으로 채택하고
다른 이들도 그들의
지침으로 삼도록
가르치도록 이끌었다.
즉 그릇됨이 없는
지도자는 신부를
통하여 말하는 교회가
아니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었다.”*
박식하고
웅변적인 제롬이
나타남
얼마
후에 프라하의 소동이
진정되자, 후스는
자기가 맡은 베들레헴의
회당으로 돌아가서
더욱 큰 열심과
용기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전하였다.
그의 원수들은
활발하고 강력하였지만,
왕후와 많은 귀족들이
그의 친구가 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였다.
그의 순결하고 고상한
교훈과 경건한 생애를
로마 교도들이 전하는
타락한 교리와 그들의
탐욕적이고도 방탕한
행동과 비교할 때에
많은 사람들은 후스의
편에 가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지금까지
후스는 단독으로
활동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영국에 체류해 있는
동안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제롬이 개혁
사업에 참가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
두 사람은 완전히 연합된
생활을 하였으며,
사망도 그들을
헤어지게 할 수 없었다.
대중의 인기를
끄는 재간을 가진
제롬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고,
말을 잘하고,
학식이 뛰어났다.
그러나 참된
인격을 형성하는 자질(資質)을
구비한 점에 있어서는
후스가 한층 더
탁월하였다.
그의 냉정한
판단력이 제롬의
충동적인 정신을
제어해 주는 역할을
잘하였다. 한편
제롬은 참으로 겸손하게
후스의 진가(眞價)를
인정하고 그의 권면을
잘 받아들였다.
그들의 연합적
활동으로 개혁 사업은
한층 더 신속히
확장되어 나갔다.
하나님께서
택함을 입은 그
사람들의 마음에 큰
빛을 주셨으므로
그들은 로마의 여러
가지 오류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전해
주어야 할 빛을 남김없이
다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로마교의
흑암에서 나오도록
인도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들은
온갖 큰 장애를 만나야
할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을 한 계단씩
한 계단씩 인도하여
내셨다. 그들은
모든 빛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정오의 햇빛과
같이 눈부시게 밝은
빛이 주어졌었더라면,
암흑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사람들처럼 그들은 돌아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사람들이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빛을
나타내 주셨다.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충성된 일꾼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사람들을 차츰 깊은 개혁의
길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콘스탄스에서
개최된 큰 회의
교회
내의 분열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세 사람의 법왕이
제각기 최상권을
장악코자 다투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국은
범죄와 소동으로
충만하여졌다.
그들은 피차에
저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속적
무력에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각각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를 모집하기
위하여 애썼다.
물론 돈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위
교회에 속한 은사,
지위,
축복 등이 돈으로
매매되었다.
신부들도 역시
그들의 위에 있는
성직자들의 본을 받아
성직을 매매하고
자기의 상대자를
넘어뜨리고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싸웠다.
이러한 철면피한
행동들이 날마다
증가되어감으로 후스는
소위 종교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가증한
행위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백성들도
로마교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교국을 비참하게
만드는 자들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프라하에는 바야흐로
유혈의 참극이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옛날에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왕상
18:17)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도시는 두
번째로 파문을
선고받았고,
후스는 시골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사랑하는 베들레헴
회당에서 행하던 그의
충성된 증언은 그쳤다.
이제 그는 진리의
증인으로서 그의
생명을 바치기 전에
더욱 넓은 무대에서 온
그리스도교국을
향하여 말할 것이었다.
온 유럽을
혼란에 빠지게 한
화근을 제거하기
위하여 콘스탄스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시기스문트(sigismund)
황제의 희망에
따라 세 경쟁자 중의
하나인 요한 23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법왕 요한은 원래
회의를 소집하는 것을
환영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인격과 정책에 있어서
당시의 교인들에게서
뿐 아니라 타락한
주교들로부터도 힐책과
비난을 받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시기스문트의 뜻을
반대할 수가 없었다(부록
**16 참조).
회의에서
달성되어야 할 주요한
목표는 교회의 내분을
화해시키고,
이단을 뿌리 뽑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참칭(僭稱)
법왕과 새로운
주장을 퍼뜨리는
주동자로 지목된 얀
후스가 그 회의에
소환되었다.
그 참칭 법왕들은
모두 자기들의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직접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그들의 대표자들을
참석시켰다.
법왕 요한은
표면상으로 그 회의의
소집자였지마는,
황제가 자기를
폐하려는 은밀한 목적이나
없는지, 또는
자기가 삼층관을 얻기
위하여 자행한 범죄와
그 삼층관을 욕되게 한
행위에 대하여 문책당하지나
않을지 하는 여러 가지
불안과 의구심(疑懼心)을
가지고 회의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높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과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위풍 당당하게
콘스탄스 성으로
들어갔다. 시(市)의
고관들과 성직자들은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그를 환영하였다.
그의 머리 위에는
황금으로 만든 천개(天蓋)가
덮이었고, 그것을
그 지방 장관 네 사람이
붙들고 있었다.
성체(聖體)는
그의 앞에서 운반되어
가고, 추기경들의
화려한 복장들은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그 때에 또
다른 여행자가
콘스탄스 성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후스는 자기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길을
마치 영원한 이별의
길인 것처럼 느끼고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차츰
화형주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보헤미아의
왕으로부터 그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통행권을 받았고,
또한 시기스문트
황제가 보증해주는
여행 도중의 안전을
위한 통행권까지도 받았지마는
도저히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고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갔다.
회의에
임석하려는 후스
프라하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형제들이여 …
나는 왕의
통행권을 가지고 나의
많은 대적들을
만나고자 떠나가고
있다. … 나는
나의 구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내가 능히 저들을
대항할 수 있도록 나의
입에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신중하신
정신을 넣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그대들의 열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로 나는
믿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진리로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주시고,
시련이나 감옥이나
필요하면 잔인한
죽음까지라도 용기있게
당하게 하실 줄로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일에 참을 수
있도록 본을 보여
주셨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다.
그분께서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종들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비천한
인간들이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
또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정결해 지는데 어찌
우리가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사랑하는
친구여, 만일
나의 죽음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된다면, 그날이
하루 속히 이르도록,
그리고 내가
당하게 될 모든 고난에
그분께서 항상 나를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하라. 만일
내가 그대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라면 나로
하여금 오점(汚點)없이
돌아가게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곧 나의 형제들에게
훌륭한 본을 남겨 나를
따라오게 하도록 복음의
진리의 일점 일획이라도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라.
아마도
프라하에서 그대들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로
하여금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그 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지식과 사랑으로
마음을 더욱 굳게 하여
전진하여야 할 것이다.”*
후스는 복음의
사도가 된 어떤 신부에게
보내는 또 한 장의 다른
편지에서, 과거에
화려한 의복을 입기를
좋아하고 천박한 일로
시간을 낭비한다고
그를 비난하였던
자기의 과오를 충심으로
사과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래와 같이 감동적인
권고를 덧붙였다.
“직록(職祿)이나
재산에 마음을 팔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으로
그대의 마음을 채우라.
그대의
마음보다도 집을 더
꾸미지 말고,
영적 집을 세우는
데 관심을 쏟으라.
가난한 사람들을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며, 그대의
물질을 열락하는 일로
낭비하지 말라.
그대가 만일
그대의 생애를 고치고
사치스러운 생애를
끊어 버리지 아니하면,
내가 지금 심하게
징계를 받고 있는 바로
그 징계가 그대에게
미칠까 염려된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나의 교훈을
받았으므로 나의 교훈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이상
더 쓸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대가
아는 바와 같이 한 때
내가 빠졌던 어떠한
허영에도 그대는 빠지지
말기를 나는 주의
자비를 힘입어
그대에게 간원한다.”
그리고 그
겉봉에는 “나의
친구여, 그대는
내가 죽은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이
봉투를 뜯지 말라”*고
써 있었다.
후스는 그
여행 중에서 자기의
교리가 도처에 전파된
것과 자기의 전도
사업이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의
곁으로 몰려왔으며,
어떤 고을에서는
지방 장관이 그를 따라
거리를 같이 걷기도
하였다.
신앙의
포기냐, 죽음이냐
콘스탄스 성에
도착하자, 후스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허락되었다.
황제의 통행권에는
다시 법왕의 개인적인
보증이 첨부되었다.
그러나 이 엄숙하게
반복된 보증도
무시되고, 얼마
후에 그 개혁자는
법왕과 추기경들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곧 불결하고
음침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라인 강 건너편에
있는 튼튼한 성안으로
이송되어 죄수로
수감되었다.
이러한 법왕의
배반은 법왕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였으며,
오래지 아니하여
그 법왕도 또한 그 동일한
장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회의
석상에서 살인,
성직 매매,
간음,
그 외에도 말할
수 없이 더러운 죄악을
범한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그는
회의의 선고로 삼층
면류관을 박탈당하고,
동시에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참칭
법왕들도 폐위당하고
새로운 법왕이
선정되었다.
후스가 개혁을
요구하며 신부들을
비난해 왔던 죄들보다
더 큰 죄를 법왕 자신이
범했지만, 법왕을
파면시킨 바로 그 동일한
회의는 이제 이 개혁자를
처치해 버리기로 하였다.
후스의 투옥은 보헤미아
사람들의 큰 분노를
일으켰다. 유력한
귀족들이 대회의
석상에서 이러한
횡포한 행위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하였다.
자기가 발행한
통행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황제는 후스에 대한
조치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개혁자의
원수들은 악독하고
완고하였다.
그들은 황제의
편견과 그의 공포심과
교회에 대한 그의 열성
등을 들어 황제에게
호소하였다.
그들은 “비록
황제나 국왕으로부터
통행권을 받은 자일지라도
그가 이단이거나
이단의 혐의를 받은
자일 경우에는 그로
더불어 맺은 약속이
이행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장황한 이론을 펴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득의했다.
감방의
습기와 불결한 공기
때문에 열병에 걸려서
거의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지마는 마침내
후스는 대회의에
끌려나왔다.
그는 무거운
쇠사슬에 매인 채로
황제 앞에 섰다.
이 황제는 일찍이
자기의 명예와 훌륭한
신앙으로 후스를 보호해
주기로 서약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긴 심문을 통하여
후스는 확고 부동하게
진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제 그
곳에 열석한 교회와
정부의 고관들 앞에서
거리낌없이 교권의
부패를 규탄하였다.
자기의 교리를
취소하든지 죽음을
택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그는
순교자의 운명을
수락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붙들었다.
그가 최후의
선고를 받기 전에 있은
고난의 몇 주일 동안에
그에게는 하늘의 평화가
마음에 충만하여졌다.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나는 옥중에서
내일 사형 선고가 내릴
것을 기다리면서
쇠사슬에 매인 손으로
이 편지를 쓴다.
…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내세의
귀한 화평 중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대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자비를 베푸신 것과
내가 당한 시험과 시련
중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나를 도우셨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음산한
옥중에서 그는 참된
신앙의 승리를 미리
보았다. 꿈
가운데 그는 자기가 복음을
전하던 프라하의 교회당으로
돌아가서 그가 벽에
그렸던 그리스도의
그림들을 법왕과
주교들이 지워 버리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은 그를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
그는 더욱 많은
화가들이 더욱 찬란한
채색으로 더욱 많은
그림들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을 마치자마자
그 화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
이제는 법왕이든지
감독이든지 와 보라.
그들이 더 이상
다시는 이 그림들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고
부르짖었다.
개혁자는 그가 꾼
꿈에 관하여 ‘나는
그리스도의 상(像)을
결단코 지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들은 그것을
소멸시켜 버리고자
했지마는 나보다 훨씬
더 유력한 전도자들로
말미암아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롭게
그려질 것이다’고
말하였다.”*
후스의
장렬한 최후
후스는
마지막으로 큰 회의에
소환되었다.
그것은 실로
규모가 크고도 엄숙한
집회였다. 황제와
왕공과 사신과
추기경들과 감독과
신부들이 열석하고,
밖에는 허다한 방청자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한 긴
투쟁에서 최초의 큰
희생자를 목격하고자
그리스도교국의 각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후스는
최후의 결심을 표명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자기의 견해를
철회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약속한 바를
아무런 가책 없이
깨뜨려버린 황제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나는
여기 임석한 황제의
신의(信義)와
공공연한 보호 아래 내
자신의 자유 의사에
의하여 대회의에
출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고
언명하였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에게
집중되었으며,
시기스문트는
얼굴을 붉혔다.
선고가
언도되고, 지위를
박탈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감독들은 그
죄수에게 승려와 같은
옷을 입혔다.
후스는 승복을
손에 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치욕을 받으실 때에
흰옷을 입으시고
헤롯에게서
빌라도에게로
호송되셨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다시 받게 되자
그는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순결한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구원을 이제
죽기로 작정된 불쌍한
나의 몸 이상으로 귀중하게
여긴다.” 그의
제복(祭服)은
하나씩 차례로 벗기워졌는데,
그럴 때마다
의식을 행하고,
열석한 감독들은
차례대로 저주를
선언하였다.
드디어 “그의
머리 위에는 모자 곧
피라밋 모양으로 만든
종이 고깔이 씌워졌는데,
거기에는 악마의
무서운 형상이 그려져
있고 대이단자라는
글자가 그 앞면에
뚜렷하게 씌여 있었다.
후스는 ‘주
예수여 이 종은 더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당신을
위하여 치욕의 관을
쓰나이다. 나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주 예수여!’
하고 부르짖었다.”
이런
의식을 행한 후에 “주교는
‘네
영혼을 마귀에게
주노라’고
말하였다. 그
때에 얀 후스는 하늘을
우러러, ‘오,
주 예수여!
당신이 나를 구원하셨으니,
나는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고
말하였다.”*
그 후에
그는 세속적 권세에
맡겨져 처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그의 뒤에는 많은
군중, 몇백
명의 무장한 사람들,
아름다운 의복을
입은 신부와 주교들,
콘스탄스 성의
주민들이 따랐다.
그가 화형주에
결박되고 불을 붙일 수
있는 준비가 다 갖추어졌을
때에 그 순교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그의
오류를 취소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한 것과
전파한 것은 모두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확인하기를
매우 기뻐한다.”*
이윽고 불을
붙이매 그는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찬미를 그의 목소리가
영원히 그쳐질 때까지
불렀다.
심지어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열광적인 법왕당의
한 사람은 후스와 그
후에 있은 제롬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두 사람은
다같이 최후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화형을 받기 위하여
나아가기를 마치 혼인
잔치에 나아가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고통의
부르짖음도 발하지
않았다. 불길이
일어날 때에 그들은
찬미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그 불길의 기세도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그치게 할 수 없는 듯하였다.”*
후스의
몸이 다 타버린 다음에
그들은 그 재와 흙을 모아서
라인 강에 던져 대해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의 핍박자들은
그가 전한 진리를 근절한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날에 던져진
재가 대해로 흘러가서
각 나라에 씨를 뿌리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질
것을 그들은 거의
생각지 못하였다.
콘스탄스의
회의장에서 부르짖은
그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그 후 각 시대를
통하여 쉼없이 울려
퍼질 것이었다.
후스는 이미 가고
없으나 그가 생명을 바쳐서까지
옹호한 그 진리는 결코
멸절될 수 없었다.
그의 신앙과
충성의 모본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문과 사망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의 처형(處刑)은
횡포한 로마의
잔인성을 전세계에
드러내 보이는 일이
되었다. 진리의
원수들은 자기들이
없애 버리려고 한 그
사업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히려 발전시키는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다.
제롬의
옥중 생활
이제 또 하나의
화형주가 콘스탄스
성에 세워질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의
증인의 피가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여야 할
것이었다. 제롬은
후스가 대회의에
나아갈 때에 그와
작별하면서 그에게
용기와 확고한 태도를
가지라고 권면하고
만일 그에게 위험이
있을 때에는 즉시 도와주겠노라고
하였다. 개혁자의
투옥(投獄)
소식을 듣자
충실한 그 제자는 곧
약속을 이행하려 하였다.
그는 통행권도 가지지
않고 한 동료를 데리고,
콘스탄스 성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그 곳에 도착하자,
후스를 구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성에서
피하였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그는 붙잡히어
쇠사슬에 매여 일단의
군인들에 의하여
호송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회의에
끌려나와 그에 대한
소송에 답변을 하고자
했을 때 그는 “화형에
처하라, 화형에
처하라”는
부르짖음을 듣게
되었다.* 그는
큰 고통을 느끼도록
쇠사슬에 결박된 채로
투옥되어 있었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물과 빵뿐이었다.
옥중에서 너무나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므로
제롬은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원수들은 그가
그대로 죽을 것을
염려하여 약간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그는 약 1년간
옥중에 그대로 갇히어
있었다.
후스의
죽음은 법왕당에게
있어서 기대한 것만큼의
효과가 없었다.
후스의 통행권에
대한 침해가 심한
분노와 물의를
일으켰으므로,
더 안전한
방법으로, 대회의는
제롬을 화형에 처하는
대신에 할 수 있는 대로
그를 강요하여 그의
주장을 취소하게
하고자 결정하였다.
그는 회의장에
끌려나와 오류를
취소하든가,
화형으로 죽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가 당한 무서운
고난을 생각해 보면
수감 초기에 죽는 것이
도리어 그에게는 동정
깊은 처사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제 옥중에서
당한 고통으로 얻은
질병 때문에 기력이
쇠하여졌고,
근심과 불안에서
오는 괴로움,
친구들과의 이별,
후스의 죽음으로
인한 낙심 등과 같은
일들로 말미암아
제롬의 용기는 꺾이어
마침내 그는 회의에
굴복하였다.
그는 가톨릭의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고, 위클리프와
후스가 가르친 교리 중
소위 “신성한
진리”*이외의
것을 정죄한 회의의
결의를 수락하였다.
이와 같은
임기 응변의 수단으로
제롬은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키고 절박해
오는 죽음을 면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감방의
적막 속에서 그는
자기가 한 일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후스의 충성과
용기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것과 비교해서
진리를 거부한 자기의
무가치한 행동을
숙고하였다.
그는 자기가
섬기기로 서약한 거룩하신
주님,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였다.
신앙을 취소하기
전에는 온갖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확증으로 말미암는
위로가 있었지마는
이제는 그의 마음속에
오직 후회와 의혹과
고민만이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로마교와 화해하려면
아직도 여러 번 신앙의
취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아가는
길은 완전한 배도로
끝날 것이었다.
그는 잠깐 동안의
고난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의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후스의
뒤를 따른 제롬
곧
그는 다시 회의에
끌려나왔다.
그의 재판관들은
그의 굴복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피에
목마른 저들은 후스의
죽음으로 자극을 받아
새로운 희생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제롬은 진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제롬은 그 신앙을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의 형제 순교자의
뒤를 따라 화형을
당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지난번의 말을 취소하고,
죽음을 각오한
사람으로서 변명할
기회를 달라고 엄숙히
요구하였다.
그의 말이 끼치게
될 영향을 두려워한
주교들은 그에게 대한
고소에 대해서만
가부간에 대답하라고
강요하였다.
제롬은 이와 같이
잔혹하고 불의한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너희들은 나를
무서운 감옥,
불결하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곳에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은 채 3,
40일간 구금하였다.
그리고 나를 너희
앞에 끌어내어 나를
죽이려는 원수들의
말은 들어 주면서 나의
증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 만일 너희들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들이고 전세계의
광명이라 자처한다면
정의에 대하여 범죄치
않도록 조심하라.
나는 다만 하나의
연약한 인간이다.
나의 생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불의한
선고를 하지 않도록 너희들에게
권고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보다 너희들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의
요구는 마침내
수락되었다.
제롬은 재판관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령이 자기의 생각과
말을 제어해 주시므로
주님을 욕되게 하거나
한 마디라도 진리에
어그러지는 말을 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날에 그에게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에게
주신 바 언약,
곧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8-20)고
하신 그 언약이
성취되었다.
제롬의
말은 그의 원수들까지도
경탄케 하고 놀라게
했다. 그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번민 속에서 1년
동안 감옥에 갇힌 채로
보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마치 그가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분명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불의한 재판관들에
의하여 정죄의 선고를
받았던 성도들을
일일히 열거하였다.
그는 어떠한
시대에든지 그 시대의
백성들을 계몽하려고
힘쓴 자들이 비난을
받고 배척을 당하였으나
후에는 영광을 받은
것과 그리스도 자신도
불의한 법관에게
악인으로 정죄를 받으신
사실을 지적하였다.
신앙을
취소하였을 때 제롬은
후스가 정죄를 받은
것을 당연하다고 동의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회개를
선포하였으며 그
순교자의 무죄와
성결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는 그를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그는 의롭고
거룩하며 가장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죄없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 나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언젠가는 아무도
속일 수 없는 크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기만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나의 원수들과
거짓 증인들이 마련해
놓은 고통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법관들
앞에서 행한 제롬의
신앙 고백
그는
자기가 진리를 부인한
사실에 자책감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말하였다.
“청년 시대 이후로
내가 범한 모든 죄악
중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내가 이 흉악한
장소에서 범한 죄이다.
이 곳에서 나는
나의 스승이요 친구인
거룩한 순교자 얀
후스와 위클리프에 대하여
내린 간악한 선고를
시인하였다.
그러나 나는
충심으로 그 일을
참회한다. 나는
불명예스럽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두
사람의 교리를 부인한
것을 고백한다.
…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여러 가지 죄를
용서해 주시되,
가증한 이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는 재판관들을 가리키면서
엄숙하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위클리프와 얀 후스에게
정죄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들이
교회의 교리를 침해한
연고에서가 아니고,
그들이
성직자들의 비행과
추문, 곧
그들의 허식과 교만,
주교와 신부들의
온갖 죄악들을
적발하여 공격하였기
때문이었다.
위클리프와 후스가
말한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나 역시
너희들을 규탄하는
바이다.”
그의 말은
저지되었다.
주교들은 격분하여
떨면서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한가?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가장
완고한 이단자를 직접
목격하고 있다”고
부르짖었다.
제롬은
소란한 중에서도
확고한 태도로 말하였다.
“무엇?
너희들은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줄로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과거 1년
동안 죽음보다 더욱
참혹하고 무서운 감옥
속에 나를 가두었다.
너희들은 나를
터어키 사람들과
유대인들과
이교도들보다 더욱
잔혹하게 취급하였으므로
나의 살이 사실상
썩어서 나의 뼈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나는 불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탄식은
마음과 정신을 병약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처럼 심한 만행(蠻行)을
감행하는 데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소동이 일어났으므로
제롬은 급히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그 때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는
그의 말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생명을 구원하려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제롬은 교회의
권력자들의 방문을
받고, 대회의의
결정에 복종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로마교에 대한
반대를 취소한다면,
그 보상으로 그의
앞에 가장 밝은 전망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영화가 주어지자
제롬은 그의 주님처럼
그것을 확고하게
물리쳤다.
“성경으로
나의 오류를 지적해
준다면, 나는
그것을 거리낌없이
버리겠다”고
그는 단언하였다.
“성경이라고?
그렇다면 만사를
다 그것으로만
판단해야 된단 말이냐?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지 아니하면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고
그를 유혹하는 자들
중의 한 사람은 부르짖었다.
이에 대하여
제롬은 대답하였다.
“우리 구주의
복음보다도 사람의
유전이 신앙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바울은
자기의 편지를 받을
사람들에게 사람의
유전을 들으라고 권하지
않고, 도리어
‘성경을
상고하라’고
말하였다.”
“이단이다”라는
부르짖음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너를
위하여 그처럼
오랫동안 애원한 것을
나는 후회한다.
네가 악마의
충동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드디어
그는 정죄의 선고를
받았다. 그는
후스가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장소로
끌려나갔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갔는데,
그의 얼굴은
평화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죽음의 두려움이
없었다. 사형
집행자가 불을
붙이려고 그의 뒤로
돌아가자, 그
순교자는 “꺼릴
것 없이 앞으로 나와서
나의 눈 앞에서 불을
붙여라. 내가
두려워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화염이
그를 둘러싸자 그는
최후의 기도를 드렸다.
“주여,
전능하신
아버지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언제나 당신의
진리를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나이다”*고
그는 외쳤다.
마침내 그의
소리는 그쳤으나
기도하는 그의 입술은
그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불길이
그치자 그 순교자의
재는 거기에 남아 있는
흙과 함께 후스의 재처럼
라인 강에 던져졌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파한 진리의 빛,
그들의 영웅적인
모본으로 남긴 광채는
소멸될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세상에
다가오고 있는 여명(黎明)을
막으려는 것은 마치
사람이 태양을
돌아가는 궤도에서
역전(逆轉)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한 것이었다.
지스카
장군의 분기(奮起)
후스의
처형(處刑)은
보헤미아에 분노와 공포의
불길을 일으켰다.
온 국민들은 후스가
승려들의 적의(敵意)와
황제의 배신으로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충성된
진리의 교사였음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그에게 사형 언도를
내린 대회의는 살인죄를
범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교리는 어느 때보다
더욱 큰 관심을 끌었다.
법왕은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정죄하고 불태워
버리라는 조서를
내렸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그 저서들
중에서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을
그것들이 숨겨져 있던
곳에서 가져와
성경전서나 혹은
사람이 구할 수 있는
성경 중의 어떤
일부분과 대조하여
연구하였으며,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개혁자들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후스를
죽인 자들은 그의
운동이 승리하는 것을
조용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법왕과
황제가 연합하여 이
운동을 진압하려
하였으며, 시기스문트의
군대는 보헤미아를
향하여 몰려왔다.
그런데 이
때에 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는
개전 직후에 두 눈을 다
잃어버린 지스카(ziska)로서
당시에 가장 훌륭한
장군 중의 한
사람으로서 보헤미아군의
지휘관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들의 사업의
정당성을 신뢰하면서
사람들은 침공해 오는
가장 강력한 군대와
맞서 싸웠다.
황제는 여러 번
거듭하여 새로운
군대를 보내어 보헤미아를
공격하였으나 굴욕적이게도
격퇴를 당할 뿐이었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아무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었다.
개전 후 불과
수년 만에 그 용감한
장군 지스카는 죽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용감한,
아니 어떤 점으로는
그보다도 더욱 훌륭한
장군인 프로코피우스(Procopius)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보헤미아인의
원수들은 그 눈먼
용사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들이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줄로 믿었다.
법왕은 후스의
신봉자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보낼
것을 포고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급히 많은 군대를 보헤미아로
투입시켰으나 결국은
엄청난 패배를 당할 뿐이었다.
또 다시 십자군의
파견이 선포되었다.
유럽에서 법왕을
지지하는 모든
나라들로부터 전쟁을
위하여 사람과 자금과
군수품들을 모았다.
허다한 무리들이
법왕의 깃발 아래 모여서
마침내 후스의
신봉자들인 이단을 멸절시키겠노라고
약속하였다.
필승의 신념으로
많은 군사들이 보헤미아로
쳐들어갔다.
보헤미아의
백성들도 그들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집결하였다.
두 군대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對峙)하였다.
“십자군은
월등하게 우세한 군대였으며,
후스의
신봉자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참으로 먼 거리에서부터
왔기에 그 시내를
건너서 급히 돌진하거나,
그들과 접전하기보다는
조용히 서서 상대방의
전사들을 주목하여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 때에 그들은
갑자기 기이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에
의하여 쫓겨 가듯이 한
번 공격해 보지도
못하고, 그
대군은 깨어지고
흩어졌다. 무수한
군사들이 도망하다가
그들을 쫓아간 보헤미아군에게
살육을 당하고,
막대한 전리품이
승리자들의 손에
돌아갔다. 그리하여
그 전쟁은 보헤미아
사람들을 곤궁에
빠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요하게 해주었다.
십자군의
파멸
수년
후에 다른 법왕이
십자군을 다시 일으켰다.
전과 같이 군대와
자금이 법왕권 하에
있는 온 유럽 각국에서
징집되었다.
이 위험한 일에
가담시키고자 권유하는
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는
누구든지 아무리 가증한
죄를 범하여도 완전히
용서받는다는 것이 보증되었다.
전쟁에서 죽는
자들은 하늘에서의 큰
상이 약속되었고 살아남는
자들은 그 전쟁터에서
명예와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증되었다.
다시금 대군이
징모되어 국경을 넘어
보헤미아로 쳐들어왔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그 대군
앞에서 퇴각하여
침략자들을 국내로 깊숙이
유인하여 들이고,
그들로 하여금
이미 승리한 줄로
생각하게 하였다.
드디어
프로코피우스의
군대는 퇴각을 정지하고,
원수들을 향하여
돌아서서 그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십자군은 그제야
그들의 실책을 깨닫고,
군대를 멈추고 그
자리에서 적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들은 적군이
접근해오는 소리를
듣자 후스파의 군대를
보기도 전에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왕족들과
장군들과 일반 군사들은
그들의 무기를 내어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하였다.
침략군의
총지휘자인 법왕의
사절은 공포감에 눌려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자
애를 썼지마는
헛수고였다.
그는 온갖 노력을
다 하였지만 마침내 그
자신도 도망하는
무리들에게 휩쓸려가고
있었다. 침략군은
완전히 패배당하였고,
막대한 전리품이
다시 승리자의 손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유럽의 가장 강력한
나라들로부터 파견된
용감하고 호전적이며,
전쟁을 위하여
훈련받고 무장한
무리로 이루어진 두 번째의
대군은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한
연약한 국민으로 편성된
소수의 방위군 앞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침략군은
초자연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기드온과 삼백명의
용사 앞에서 미디안
군대를 도망하게 하시며,
하룻 밤 사이에
교만한 앗시리아
군대를 쳐부수신
하나님께서 억압자의
세력을 꺾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다시 한 번 펴셨던 것이었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시
53:5).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일을
단념하고, 드디어
권모 술수(權謀術數)를
쓰게 되었다.
표면으로는 보헤미아인들의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을 로마의 권력에
넘겨 주는 타협책을
쓰게 되었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로마와
화해하는 조건으로 다음의
네 가지 점을 분명히
밝혔다. 성경을
강론하는 자유,
모든 교인들이
성만찬 예식에
참석하여 떡과
포도즙을 나눌 수 있고
예배 시간에 각각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성직자가 모든
세속적인 직위와 권력에서
제외되는 일,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 법정의 사법권이
성직자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취급하는 일 등이었다.
드디어 법왕측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출한 네
가지 조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 조문의
명확한 의미를 결정하는
해석권은 종교 회의 즉
법왕과 황제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조건 아래
조약은 맺어지고,
로마는 투쟁으로
얻지 못한 것을 허위와
사기로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시한 조건들에 대하여서도
성경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이 독자적인
해석을 내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 조문들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보헤미아인들은 그
조약이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화와
분열이 생기고 나중에는
투쟁과 유혈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
내란으로 인하여 고상한
프로코피우스 장군은
죽고, 보헤미아인의
자유는 없어졌다.
후스와
제롬을 배반한
시기스문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으며,
그는 보헤미아인의
권리를 옹호하겠노라고
한 자신의 서약에도
불구하고 법왕권의
확립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로마를 추종하므로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20 년간의 그의
생애는 수고와 위험으로
충만하였다.
오랫동안의
쓸데없는 전투로 그의
군대는 쇠잔하여졌고,
그의 재물은
고갈되었다.
그는 1년을
통치한 후에 국가를
내란 일보 직전에
버려둔 채 불명예로
낙인 찍힌 이름을
후손들에게 물려
주면서 죽었다.
보헤미아인의
인내와 기대
소란과 쟁투와
유혈 사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외국의
군대가 다시 보헤미아에
침입하였고,
국내의
내분(內紛)은 계속적으로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끝까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한
사람들은 지독한
박해를 당하였다.
그들의 옛날의
형제들이 로마교와
조약을 맺어 그 오류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
초기의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은 “연합된
형제들”이라는 이름으로
특수한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각층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확고한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산림과 동굴
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여러 나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여기저기에
진리를 아는 자가 있는
것과, 그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여러 읍과
촌에 흩어져 있으면서
그들처럼 박해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과,
또한
알프스 산 중에는
성경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가 있으며
그 곳에서 우상 숭배로
부패된 로마를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정보는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으며, 그들은
왈덴스인들과 교통하게
되었다.
보헤미아인들은
복음을 굳게 지키면서
박해의 어두운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에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멀리
지평선 저쪽을
주목하여 보았다. “그들은
실로 어려운 시대에
살았다. … 그러나 그들은
후스에게서 처음으로
듣고, 제롬에게서 다시
반복하여 들은 말,
곧
새벽이 오려면 한
백년은 지나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말은 후스의
신봉자들에게 있어서
마치 애굽에 속박되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요셉의
유언, 곧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사
허락하신 땅에
돌아가게 하시리라’
고
한 유언과 같았다.”*“15세기
말엽이 되자 ‘연합된
형제들’의 교회는
더디기는 하였으나
확실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고난을 면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평화를 누렸다. 16세기
초엽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그들의
교회가 약 200곳 정도 있었다.”*
“그러므로 불과 검의
멸망과 분노에서
벗어난 남은 자로서
후스가 예언한 그대로
새벽을 맞이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다.”*